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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가

그러니까 대행사 출신이 뭐가 어때서요

아무튼 두 달만에 왔습니다. 저도 제가 두 달만에 글을 쓰게 될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데요.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소소하게 여행도 다녀왔고 취업준비도 하고 이직도 성공하느라(!) 그랬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말 알 수가 없더군요. 원래는 이 티스토리에 꼭 이런 글을 써야지 했던 것들을 생각해놨었는데, 수 번의 면접을 보면서 모든 주제에 앞서 이걸 먼저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제가 본 면접의 배경부터 말해야합니다. 저는 그간 대행사에서 꽉 채워 5년 3개월을 일했고 그만뒀습니다. 슬슬 일하고 싶어질 즘 회사를 구할 때 생각했던 건 "또 대행사를 다니느니 알바를 하고 말겠다"는 생각이였습니다. 그냥 더 이상 대행사에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이 전 회사가 그렇게 치가 떨릴만큼 싫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지만 더이상 대행사에 몸담고 있고싶지 않아졌습니다. 면접 때 말한 몇가지 이유가 있고, 스스로는 그 이유들을 합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명확한 이유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인하우스 직무로 서류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니 인하우스의 면접을 보게 됐고, 당연히도 "왜 대행사를 그만두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정 회사에서의 면접을 떠올려봅니다. 대행사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들러붙었어요. 대체 대행사에 어떤 억하심정을 가질만한 일들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말 시작과 말 끝마다 대행사 출신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기분이 좋진 않았습니다. 대행사 출신이 아니 뭐가 어때서요.

"대행사로 이직하면 훨씬 쉬울텐데요. 인하우스는 경력을 다 인정해주지도 않을거고. 왜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 같으세요?"
"대행사 출신인 분들은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더라고요. 우리는 훨씬 더 깊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시장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한다고요."
"대행사 출신은 아무래도 산업에 대한 생각이 얕을 수밖에 없죠. 들어오면 그 컨센선스 맞추기가 힘들거예요. 여기는 다 이 일에 진심이거든."

아니 대행사 출신이 뭐가 어때서요!
라는 말이 턱끝까지 나왔지만, 마지막 한 마디에서 잠시 고개를 숙입니다. 사실 맞는 말 같아서요.

"대행사에서 마케팅을 시작하면 마케팅을 먼저 배우지만, 인하우스에서 마케팅을 시작하면 그 시장을 먼저 배워요. 이 시작의 차이가 완전히 다른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지금은 (상술한 회사가 아닌 다른 곳이지만) 인하우스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지만 점점 더 그 말 하나에만큼은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면접경험이 좋지 못했거든요? 일부분 마음 상한 부분도 있다고요. 아니 대행사도 일 열심히 해요! 물론 대충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어딜 가나 똑같고, 전 그래도 능동적으로 시장까지 고민하려고 노력했다고요. 심지어 사수들도 다 인하우스 출신이였어요! 나도 그리고 마케팅에 진심이야악! 이라고 외치고 싶었던 수많은 고통을 지나 회사를 나왔을 땐 멀미가 나서 주저앉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 말 하나에만큼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케팅을 먼저 배우는것과 브랜드나 브랜드의 시장을 먼저 배우는 건 완전히 달라요. 왜 대행사가 결국은 '대행'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내가 회사를 다닐 때 이런저런 지적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뭘 우선순위로 생각해야하는지도 조금은 생각할 수 있었구요. 대행사는 결국 '보이게끔' 일할 수밖에 없고, 브랜드나 시장을 사랑하기에는 그럴 여력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내가 그렇게 집착했던 매체세팅, 성과, 매체 내 효율은 내가 그것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거예요. 브랜드 자체의 부스팅을 볼 수 있는 지금 저는 매체세팅 그냥 대행사 맡겨버리죠. 이정도 리소스는 패스해도 될 것 같아요.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행사 다닐 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광고주가 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어떤 마케팅이든 내재화하는 건 중요하지만 결국은 ROI고 사업이고 매출이고 돈계산입니다. 이 리소스를 대행사에 맡겨버리고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을 기획해야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대행사 다닐 때는 주어지는 파이가 매체운영이였기 때문에 그거에 집착했고, 랩사에 맡기겠다는 말만 들으면 분조장마냥(!) 달려들었었는데요. 이만큼의 업무가 주어진다면 어찌됐든 이 안에서 나를 증명해야한다고 아등바등 생각했으니까요.

대행사 출신이라 좋은 점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인하우스 사람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게 대행사였어요. 우리는 짧은 시간에 클라이언트에게 "우리가 이만큼 고민했고 너희만큼 생각했고 이렇게 해낼 수 있어" 라고 말해야하는 사람이니까요. 내부에 있을수록 오히려 브랜드보다 대행사가 단기간에 깊게 고민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은 합니다. 그리고 업무속도가 빠르죠. 아무튼 야근은 싫고 집에 가야해서 익혀놓았던 다양한 툴들과 업무방식들이 여기서는 빠르게 업무를 처리한다는 피드백으로 돌아옵니다. 커뮤니케이션도 용이해요. 제작팀과 일했던 경험, 광고주와 일했던 경험, 광고주 중에서도 대표와 일했던 경험, 말단 신입사원과 일했던 경험... 맥락을 맞추고 의견을 전달하는데에 좋은 습관들을 들였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던 팀장의 조언들이 왕왕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럼 얼른 고개를 털어 잊어버리곤 합니다만 그래도 아, 이게 그래서 필요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무튼 대행사 출신의 인하우스 점프는 성공했습니다. 아직 퇴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경력도 처우도 원하는대로 인정해주는 곳으로 왔다고요. 그 면접경험 자체는 정말 별로였어요! 그래도 어딜 가나 배우는 게 있습니다. 이 시장을 먼저 알게 된 게 아닌만큼 머리를 똑바로 굴려야합니다. 브랜드에 이입하고 소비자에 이입하는 수준을 잘 맞춰야하고요. 인하우스에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한 위험을 넘어 이 브랜드를 키워야합니다. 대행사 5년차, 이제는 어디 가서 나이가 어리니 신입 취급도 못받는 신세. 여기서 커리어하이를 찍어야만 다음 회사를 잘 갈 수 있습니다. 대행사를 가더라도 훨씬 더 잘 하고, 잘 아는 상태에서 가고싶으니까요. 

 

힘내보겠습니다. 대행사 출신, 이왕 들을 말이라면 좀 멋진 상태에서 듣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