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주로 걷는다.
라고 말해오던 나라 그랬는지, 무슨 바람이 불어 그랬는지, 아는 지인에게 제안받은 22km 걷기에 불쑥 동참해버렸다. 이런 거 할 때는 보통 거리를 가늠해보지 않고 무작정 가는 게 좋다는 걸 아는 나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그냥 밤 열시에 냅다 한강에 도착했다. 사실 수업이 이리저리 취소되었음에도 저녁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아침부터 학교를 간 상태 거의 그대로 (짐만 집에 놓고) 다시 나왔다는 게 웃기지만.
완전히 초면인 사람들과 22km를 걸었다. 내 성격이 얼마나 내향형이 되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래도 밤공기는 좋았고, 서울의 별은 예뻤다. 서울에서도 아직 별이 있구나.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기도 했다. 한강의 낡은 표지판들을 툭툭 찍어내리며 배터리를 다해가는 리코를 꼭 쥐었다. 추웠지만 롱패딩을 개시했고, 빼빼로데이를 기념해 당 떨어지면 먹을 빼빼로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도한 단체에서 준비해준 핫팩을 부여잡았다.
성향이 그렇다. 해야지, 하면 해야한다. 중간중간 이제 적당히 걸었으니 그만할까-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괜스레 걱정이 됐다. 지금 멈추면 아쉬울 것 같은데. 두번은 없어도 한번은 22km 걸어보고 싶은데. 혹시 정말 멈추면 어떡하지? 뭐 이런. 다행히도 멈추지 않고 우리는 계속 걸었다. 22km를. 22km를 걷는 동안 (대체 왜 주말이라고 낮 밤을 바꾸는지 모르겠는) 근래 가까워진 철딱서니 선배가 왕왕 응원해줬다. 우리 집에서 김포공항까지 22km라고 했다. 분당에서 서울대입구도 18km라고 했다. 나는 내 걸음으로 그 거리를 걸었다고 생각하니 두배는 뿌듯해졌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예상 외로 크게 힘들진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멀쩡했냐, 하면 그건 아닌데- 아무튼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기진맥진해있진 않았다. 물론 아침 7시가 다 되어서 들어온 집에서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자긴 했지만. 오랜만에 개운하게 잔 것 같아 걷는게 체질인가 싶기도 했다.
어딘가에 얘기해야할 지 몰라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도 해야하는 기분인데, 지난 주는 개인적으로 정말 힘든 한 주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으로 바로 오는 탓에 가능한 스트레스를 외면하려고 하는데, 지난 주는 너무 거대한 나머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수준이였고 아니나 다를까 컨디션이 극악으로 떨어졌다. 빠져들고 싶지 않아 발악을 해야했고 대부분 책과 잠으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일대로 해내야했고 바쁜 시즌이였기 때문에 (게다가 학교까지) 집만 오면 아무튼 뻗어버리기 일쑤였다. 뭐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든 삶이 살아지든 할텐데 아무것도 못하고 잠만 자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22km를 걸으면서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얼마나 남았지? 언제 끝나지? 왜 이렇게 춥지? 그만 둘 순 없나? 하는 생각을 다 비우고 걷자고. 쉬지도 말고 멈추지도 말고 걷자고. 늘어지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그냥 다리를 옮기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니까. 22km가 결국 끝날거야, 라고 되뇌이는 말들은 사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였다. 끝날거야. 지나갈거야. 나는 다시 행복해질거야. 뭐 그런.
그리고 잘 걸었고, 잘 끝냈고, 잘 웃었다. 22km는 즐거웠고 그 사이에 했던 대화들도 재밌었다. 완전히 드라마처럼 빛나기만 했냐고 하면 그건 아니고,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지만 의미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냥 걷자, 그럼 끝날거야. 라고 되뇌일 수 있는 게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그래. 결국 끝날거야. 그냥 걷자. 모든 건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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